전남의 산 들

고흥 천등산 금탑사

태평 2015. 4. 11. 23:41

             금사마을-금탑사앞-천등산 등산로-신ㄴ선바위-천등산- 칼바위-천등산-

          금탑사-금사마을

              금사마을 버스정류소 옆 돌게단으로 오릅니다

 

                   국제신문 산행도 짧은 산행으로 금탑사에서 원점회기 두세시간 소요

 

             도로따라 5분 오르면    산장

 

          계곡 물소리 들으며 오름

 

                              도로공사 하면서 하나 세워 놓은듯

                     금탑사 입구의 안내도

 

                 안내판 앞의 등산로

 

               20분 오르면 기암 괴석

 

 

 

       

                   암봉에서 바라본 천등산

 

                  건너 철쭉공원 진달래인지

 

 

 

                 진달래 숲길의 등로

 

              칠부능선에서 바라본 금탑사와 지나온 암봉

 

                 신선바위에서 비자나무에 둘러사인 금탑사

              철쭉공원과 안장바위

                      신선바위

 

            

            정상 옆의  암봉

 

                별학산

 

              천등산 정상

 

                            정상에서 금탑사

             별학산 방향

 

               우람하게 뻗은 칼바위 능선

 

            칼바위 능선 암봉에서 바라본 정상

           다시 돌아와 어렵게 사진한장   553.5m

 

 

                      신선바위에서 점심

           

 

 

 

 

        신선바위에서 10분가량 왼쪽 금탑사로 내려가는 길

 

             절터인지

 

            10분가량 내려오면  비자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금탑사

 

                 아름드리 동백나무 숲

                

 

                삼성각

 

 

 

 

 

포두면 봉림리 천등산(天燈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寺刹)이다.

천등산의 천등이란 옛날 가엽존자(迦葉尊者)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크게 천등불사(千燈佛事)를 한 것을 이르는 것이며,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印度)의 아육왕(阿育王)이 보탑(寶塔)을 건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천등산 금탑사를 불연(佛緣)이 오래된 유서 깊은 사찰로 여기게 하고자 하는 강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14 흥향현 불우조(佛宇條)에 사명(寺名)조차도 보이지 않던 금탑사가, 조선 후기의 지리지(地理誌)인「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전라도 권 5 하 흥양현 사찰조에 사명이 비로소 있을 뿐 아니라 대동지지(大東地志) 흥양산수조(興陽山水條)의 천등산의 세기(細記)에 신라문무왕 태봉금탑사(新羅文武王 胎封金塔寺) 기록이 별안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전혀 기록이 없던 사찰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사명이 나타나고 또한 색다른 기록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금탑사의 초창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 중기에는 존재했던 사찰로 보여진다. 

임진왜란(아마 정유재란이 옳을 것이다)때 섬 오랑캐로 인해 불 타 무너졌다고 한다. 이 피해로 폐사찰이 되어 단지 1층 석탑만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30년(1597) 궁현,옥순대사(弓弦,玉淳大師)가 중건했다가 숙종 18년(1692) 불에 타버리고 극락전(極樂殿)만 남았다고 한다. 

설암추붕(雪巖秋鵬 : 1651~1706)이 금탑사에 와서 칠언율시(七言律詩) <금탑사구호(金塔寺口號)를 남겼으며 고흥 출신인 영해약탄(影海若坦; 1668~1754)도 오언시(五言詩)인 제금탑사(題金塔寺)를 지었다. 헌종(憲宗) 1년(1835) 인릉(仁陵),순조(純祖)와 관련되어 사찰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헌종 11년 1845 화재를 만나 일시에 12개의 범우(梵宇)가 불타버리는 불행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사찰은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답(寺畓), 법기(法器) 등 4물(物)을 방매하기도 하고 장발로 퇴속하기도 하고, 다른 사찰로 승려가 이거하기도 하여 단지 노약한 승려 10여인만이 남아 있게 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금고(金鼓)란 법기를 방매하기도 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쇠락해져 갔다. 

 

  이 때 유명비구(有明比丘)가 철종 12년(1861) 비장한 각오로 신심(信心)을 일으켜 먼저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고 시주물을 얻어 법기를 사들여 법당에 걸어놓게 되었다. 헌종 13년(1847) 대법당(大法堂; 極樂殿) 후불정(後佛幀)을 연대암(蓮臺庵)에서 조성하여 극락전에 봉안하였다.

 

 

 

 

금탑사괘불탱은 옆으로 긴 폭에 삼세불과 주요 협시보살을 그린 독특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는 괘불이다. 크기는 길이 506㎝, 폭 648㎝로, 사천왕 등의 권속을 배제하고 주요 협시보살만으로 구성된 간략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삼세불은 화면을 가로로 3등분하여 큼직하게 그려져 있고, 상단과 하단으로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본존은 원만한 얼굴에 귀·눈·입·코 등이 작게 표현되었고,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옆으로 퍼져 있으며, 정상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되었다. 어깨는 각이 지게 표현되어 있으며, 발목에는 치견(侈絹)이 장식되어 있다....
 

 

              무주당

 

                지장전

 

                             선방

 

 

                   종각

 

          금화루

 

 

            해우소는 스님용과 손님용이 있슴

 

 

 

              금사마을 입구 금탑사 푯말

                         금사제

 

              총 소요시간 2시간45분 걷는시간 2시간

             벌교 장을 가기위해 워낙짧은 시간 이라 단축 산행 을